근로계약서 제출해야?...은행 통장 개설 '하늘의 별따기'

은행마다 지점마다 기준도 들쑥날쑥

2018-03-25     김국헌 기자

#1. 경기도 남양주시에 사는 김 모(여)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큰 아이가 은행에서 입출금 통장을 만들려고 했지만 두번이나 거절당했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근로계약서를 가지고 오거나 공과금 자동이체 통장이어야 개설이 가능하다고 했다. 김 씨가 보증을 설테니 만들어달라 했지만 대포통장 만드려는 사람 취급을 받으며 개설에 실패했다고. 김 씨는 "아이 통장 만들러 갔다가 대포통장 만들려는 사람으로 취급해 화가 났다"며 "사회초년생은 앞으로 통장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냐"라고 분개했다.

#2. 서울시 성동구에 사는 오 모(여)씨는 친구들 모임회비 총무를 맡게 돼 통장을 따로 하나 만들기 위해 은행을 찾았다. 신분증 하나만 있으면 개설이 될 줄 알았지만 통장을 왜 만드는지 증명서류를 가져와야 한다고 했다. 결국 금융거래 증명 서류인 계약서, 공과금 고지서, 회원명부, 회칙 등 모임 입증 서류를 제출하지 못해 통장을 발급받지 못했다. 결국 오 씨는 통장을 개설하지 못한채 발걸음을 돌렸다.

#3. 서울시 구로구에 사는 20대 직장인 박 모(남)씨는 사회초년생이다. 월급 통장을 만들기 위해 은행을 방문했지만 발급받지 못 했다. 신분증만 있으면 통장개설이 가능할 줄 알았으나 재직증명서나 급여명세서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은행들이 대포통장을 근절한다는 명분으로 통장개설시 요구하는 서류가 너무 많고 까다롭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소비자들은 "헛걸음치기 일쑤이고, 아예 만들 수없는 경우도 많다"며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지난 2012년 금융사기 피해를 줄이기 위해 대포통장 근절 종합 대책을 마련, 2015년부터 은행이 신규 통장 개설 및 재발급 시 금융거래 목적 확인 및 증빙서 제출 의무화 등 통장 발급 조건을 강화했다.

2016년부터는 KB국민은행, 신한은행, KEB하나은행, 우리은행, NH농협은행 등 시중 대부분의 은행들이 지점에서 신규통장을 개설할 때 실제 소유자를 확인하고 요구하는 정보 공개를 거부하면 거래를 허용하지 않는 등 절차를 강화했다. 금융거래목적 확인서 작성을 의무화했고 통장개설 목적에 따라 내야하는 증빙서류도 모두 다르다.

급여계좌가 목적이라면 재직증명서, 근로소득원천징수영수증, 급여명세표 등이 필요하고, 법인 통장을 개설하려면 물품공급계약서, 재무재표, 부가가치 세증명원, 납세 증명서 등이 필요하다. 각종 모임 계좌의 경우 구성원 명부, 회칙 등 모임을 입증하는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공과금 이체 계좌는 공과금 납입 영수증을, 아파트 관리비 계좌는 관리비 영수증 등을 제출해야 한다. 아르바이트 계좌는 고용주의 사업자 등록증, 근로계약서 급여명세표 등 고용확인 서류가 필요하고, 사업자금 계좌는 사업거래 계약서 및 거래상대방의 사업자 등록증 등이 필요하다. 그 외의 경우에도 개설 목적을 확인할수 있는 객관적 증빙서류가 필요하다.

한 은행에서 계좌를 개설한 후 다른 은행에서 계좌를 또 만들려고 하는 경우 '단기간다계좌'에 걸려 최소 1~2달 후에나 개설이 가능하다.

이때문에 앞선 사례들처럼 갓 취업해 아직 급여명세서를 받지 못한 사회초년생 직장인들이나 갓 20살이 된 성인에게도 급여명세서 등을 요구하며 통장개설을 거부하는 사례들도 발생하고 있다. 무직자나 주부들의 경우 '통장 만들기가 고시만큼 어렵다'는 뜻으로 '통장 고시(考試)'란 말까지 나온지 오래다. 

이러한 기준들은 각 은행 점포마다 차이가 있어 소비자들의 혼란도 크다. 은행 각 지점의 상황이나 해당 직원의 판단에 따라 어떤 지점에 갔을 때는 통장이 개설되고, 다른 지점에 갔을 때는 개설되지 않아 일관성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통장을 개설하러 온 고객들이 느끼는 불쾌감도 상당하다. 창구에서 통장개설을 요청하는 소비자들을 의심쩍은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대포통장 의심을 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

서대문구 창천동에 사는 윤 모씨는  "단순한 입출금통장 하나도 이렇게 까다로운 것은 아무리 대포통장 근절을 위한 차원이라지만 정도가 심하다"고 주장했다.

은행들은 금융당국의 지시로 인해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통장 개설이 거부된 고객들이 민원을 제기하거나 강하게 항의를 하는 일도 있지만 대포통장 근절을 위해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며 양해를 구했다. 

통장개설을 쉽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적금통장 개설이 있다. 적금통장을 만들면서 입출금 통장 개설을 요청하면 특별한 서류를 요구하지 않고 바로바로 만들어준다. 전기세, 수도세 등 고지서를 들고 은행에 찾아가 자동이체 통장이라고 얘기해도 통장개설이 쉽다. 인터넷전문은행이나 시중은행 비대면채널을 통해서도 통장계설이 가능하며, 오히려 점포에 가는 것보다 쉽다. 

증빙서류를 준비하기 어렵거나 소득이 없는 사람들도 통장은 개설할 수 있다. ‘금융거래 한도계좌’의 경우, 하루 인출 및 이체 한도를 최대 100만 원까지 제한하는 조건으로 발급된다. 단 은행 창구 100만 원, 자동화기기 30만 원으로 일일 이용금액이 제한된다.  

[소비자가만드는신문=김국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