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자동차 업계는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 IRA)'처럼 유럽지역 전기차 수출에 큰 제약을 가져오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반면 구체적 법안 내용이 아직 공개되지 않은 만큼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
◆ 리튬, 니켈 등 전기차 배터리 핵심 소재와 연관 깊은 원자재법
10일 자동차와 무역 업계에 따르면, EU 집행위는 오는 3월 14일 원자재법안을 공표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EU는 지난해 9월 주요 원자재에 대한 역외 의존도 축소 및 역내 공급망 구축을 목표로 원자재법 입법을 예고한 바 있다.
원자재법은 아직 구체적인 법안이 발표되지 않은 상태다. 하지만 친환경 산업, 디지털 전환에 필요한 핵심 원자재의 중국·러시아 수입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이번 법안이 만들어진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특히, 리튬과 니켈 등 전기차 배터리의 주요 소재에 대해 EU 차원의 구체적인 공급망 확보 계획 등이 포함될 예정이다. 또한 EU 및 국제 표준 기술 설정을 통한 기술 혁신 및 ESG 요건을 강조하며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도 마련될 것으로 전망된다.
◆ 미국이어 유럽에도 '무역장벽' 세워질라
원자재법에 대해 아직 구체적인 내용이 공개된 바 없는 만큼 국내 자동차 업계는 아직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원자재법은 EU 정부 차원에서 진행하는 것인 만큼, 개별 기업이나 업계에서 의견을 내기 쉽지 않다"고 전했다.
하지만 원자재법이 미국의 IRA처럼 새로운 '무역장벽'으로 등장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업계 내외에서 높아지고 있다.
특히 IRA처럼 배터리 핵심 광물에서 '유럽 또는 유럽과 FTA를 체결한 국가'에서 일정 비율을 조달해야 한다면 전기차에 필요한 배터리 공급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이는 국내 이차전지의 핵심 광물에 대한 중국 수입 의존도가 배터리 산업 주요 경쟁국 중 가장 높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수입액 기준 리튬, 니켈 등 배터리 주요 소재 대중 수입의존도는 58.7%로 주요국 중 가장 높았다. 10년 전보다 23.1%p 상승한 수치다.
이는 유럽 시장 판매 비중을 높이려는 국내 자동차 업계에 상당한 타격을 안겨줄 수 있다.
지난해 1월~11월 기준으로 현대자동차(대표 장재훈), 기아(대표 송호성)의 해외 판매 차량 중 유럽 시장이 차지하는 비율은 각각 13%, 23.5%에 달한다. 현대차와 기아의 지난해 1월~11월 유럽 시장 전기차 판매량은 각각 6만3802대, 6만6363대로, 총 13만165대다. 전년 동기 대비 8.1% 증가했다.
여기에 유럽 전기차에 혜택을 주는 법안까지 더해지면 국내 자동차 업계는 큰 피해를 볼 수 있다. 업계에 따르면, 독일과 프랑스는 지난해 12월 미국 IRA에 대응해 EU 단일시장을 보호하기 위한 보조금 제도 개편을 촉구한 바 있다.
이 때문에 유럽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원자재법에 대해 우려를 표한 바 있다.
지난해 11월 유럽한국기업연합회와 한국무역협회 브뤼셀지부는 공동명의로 EU 집행위원회에 의견서를 제출해 "자국 기업을 유리하도록 하는 차별적인 법과 규제, 보호무역주의 추세에 우려하고 있다"며 "원자재법은 최소한의 행정적 부담과 과도하지 않은 자료 요구로 EU와 비(非)EU 기업 모두가 지나치게 영향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전했다.
◆ "구체적 법안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신중해야" 지적도
일부에서는 아직 구체적으로 원자재법의 내용이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해당 법안을 과도하게 염려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무역 업계 관계자는 "원자재법 발표 시기가 미국 IRA 발표 시기와 겹치면서 원자재법을 '유럽판 IRA'로 평가하는 시선이 있는 것 같다"며 "아직은 구체적인 법안이 나오지 않은 만큼 섣부르게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전기차 배터리 소재와 관련된 규제가 생각보다는 약할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한국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국가가 배터리 관련 소재에 대한 중국 의존도가 높은 만큼, EU에서도 공급망 전환 시기를 고려해 초기부터 중국산 소재를 확 줄이라고 강요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원자재법의 구체적 사항이 어떻게 나오는가와는 별개로 미국, 유럽 등에서 자동차를 둘러싼 무역장벽이 날로 높아지고 있음은 국내 자동차 업계 모두가 피부로 느끼는 사실이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탄소, 소재 등 여러 측면에서 자동차와 관련된 무역장벽은 앞으로도 더 높아질 것"이라며 "자동차 업계에서 이에 발맞춰 더 많은 투자와 노력을 하고 있는 만큼 정부 차원에서 업계의 어려움을 해소할만한 지원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원자재법과 관련해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지난해 12월 열린 제231차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우리 기업에 부당한 차별로 작용하지 않도록 EU와 입법 과정에서부터 선제적으로 협의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소비자가만드는신문=이철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