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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외교문서 공개..'원자로 도입' 한.미 신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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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외교문서 공개..'원자로 도입' 한.미 신경전
  • 뉴스관리자 csnews@csnews.co.kr
  • 승인 2008.01.15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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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6년 우리 정부가 캐나다로부터 원자로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견제'로 막판까지 한국과 캐나다 간 협상이 난항을 겪었던 사실이 드러났다.

   또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1977년 6월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를 통해 김대중 납치사건 등 박정희 정권의 비리와 대(對)미 공작을 폭로한 것과 관련, 한국 정부가 '김씨의 망명이 성립되지 않는다'며 조속한 신병인도를 요구하는 한편 일간지 사설 등을 통해 김씨의 인격격하에 주력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외교통상부는 15일 이런 내용들이 포함된 생산 또는 접수한 지 30년이 경과한 1977년도 문서를 중심으로 17만여 쪽에 달하는 외교문서를 공개했다. 이번 외교문서 공개는 15번째다.

   이날 공개된 문서에는 김대중 납치사건 관련 김형욱 전 부장의 미국내 기자회견 및 의회증언, 미국 하원 프레이저 소위원회 한국관계 특별조사단의 방한, 김창근 주월남 대사관 2등 서기관 탈출 수기, 캐나다 원자로 도입관련 차관문서 등이 포함돼있다.

   '캐나다 원자로(CANDU)형 도입 차관(1975년∼1977년)' 관련 외교문서에 따르면 한국과 캐나다 양국 정부는 협상 체결 시한이었던 1976년 1월 말 직전에 협상 결렬의 위기까지 갔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당시 한국 정부가 프랑스로부터 핵연료 재처리시설을 도입하는 사업을 추진하는 것에 미국이 반대했고 이에 캐나다 정부가 동조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1976년 1월 9일 당시 김영주 주캐나다 대사는 박동진 외무부장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캐나다 측이 프랑스로부터 도입하는 재처리시설에 대한 한국의 만족할 만한 답변이 없는 한 '원자력의 평화적 사용에 관한 협력 협정'에 서명할 가능성이 없음을 시사했다.

   '미국이 원자로를 판매하지 않는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캐나다가 원자로를 판매할 수 없다'는 캐나다 정부의 입장을 한국 정부에 전달한 것이다.

   결국 한국 외무부와 캐나다 주재 한국대사관 사이에 하루에도 수 차례 씩 전문이 오가고 양국 외무장관이 상대국 대사들과 수 차례에 걸쳐 면담하는 등 긴박하게 돌아가던 양국 간 협상은 한국 정부가 재처리시설의 도입을 무기한 연기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같은 달 26일 서울에서 체결됐다.

   또 박정희 정권에서 최장수 중앙정보부장을 지내다 미국으로 망명한 김형욱 씨가 1977년 김대중 납치사건 등 박 정권의 비리를 폭로하자 당시 한국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김 씨의 신병인도를 요구하고 고소를 제기하는 등 조직적으로 대응한 것으로 나타났다.

   외교문서에 따르면 1977년 6월23일 최규하 당시 국무총리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등은 총리공관에서 김형욱 사건에 대한 대책을 집중논의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재미교포들에게 김형욱을 상대로 민형사 고소를 제기토록 하자고 결론지었다. 또 외무부를 통해 미 행정부에 김형욱의 미국 망명이 설립되지 않음을 강조하면서 조속한 신병인도를 요구하자고 했다.

   이와 함께 각 일간지에 사설과 기획기사, 사회단체 명의의 규탄성명 등을 게재토록 하는 등 국내 언론을 최대한 활용키로 했다. 기사는 주로 김형욱의 인격을 비하하는 내용을 집중적으로 싣도록 하고 외국과의 정치자금 및 스위스은행 거래설에 대한 외신들 보도내용은 원문대로 국내언론에 보도하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정부는 대응수위가 지나치지 않도록 수위조절을 한 흔적도 보인다. 공개된 외교문서에는 김형욱 증언 가운데 위법사항에 대해선 법조항의 적용범위를 최대로 하되 자승자박이 되지 않도록 신중히 하고 국내언론 보도 역시 산발적으로 보도되도록 수위조절을 하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공개된 문서에는 1975년 월남의 패망 당시 사이공에 있던 한국 외교관들이 도와주기로 했던 미국의 비협조와 일본과 프랑스 등 현지 열강의 무관심으로 탈출하지 못하다가 일부 교민들과 함께 사선을 넘으며 어렵게 탈출했던 사안도 담고 있다.

   외교부가 공개한 '김창근 주월남대사관 2등 서기관의 탈출 수기'를 보면 김 서기관 등 월남 주재 공관원들은 미 대사관이 탈출 포인트로 정한 장소로 갔으나 미국이 자국민들을 우선 분류하느라 탈출 합류 대상에서 제외됐으며 이 와중에 한국 대사는 먼저 빠져나간 것으로 드러났다.

   김 서기관은 일본과 프랑스 대사관 측으로부터도 사실상 버림받은 뒤 결국 교민들과 탈출을 감행했고 죽음을 무릅쓰고 바다에서 5일간을 떠돈 끝에 싱가포르를 거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밖에 북한이 1977년 6월21일 200해리 경제수역을 선포하고 일본이 어로자원 확보 및 민간선박 보호를 위해 북.일 간 접촉을 시도하자 한국 정부가 이에 대한 자제를 일본 측에 요청하는 등 북.일 교섭을 적극적으로 저지하고 나섰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날 공개된 문서들은 외교사료관 외교문서 열람실에서 마이크로 필름으로 열람할 수 있으며 문서 목록은 외교사료관 홈페이지(www.diplomaticarchives.go.kr)와 국내 주요 도서관 등에 배포한 책자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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