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유명 여성 정치인이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진행된 짧은 강연에서 한 말이다.
한국인들의 냄비 근성을 더 이상 비하하고 깎아내릴 게 아니라는 취지의 이 주제를 말하기에 앞서 그 정치인은 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의 사연을 소개했다.
아이의 건강을 위해 사용한 가습기 살균제로 오히려 자기 자식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던 힘없는 소비자들의 항변이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세상으로 다시 끌어냈다는 이야기였다.
정치인들이 “소비자와 기업 간의 문제”라고 손을 떼고 해당 기업은 “우린 법대로 모든 것을 했다”며 뒷짐을 졌지만 이들 소비자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국가와 정치의 책임을 물었고 결국 여론을 이끌어 내 관련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던 과정 속에서 냄비 근성의 새로운 의미를 풀어냈다.
숱한 외면과 끊임없는 좌절에도 포기하지 않고 들끓었던 피해자들의 목소리, 그렇게 달궈진 냄비가 결국은 세상을 바꿔놓았다고.
‘냄비 근성’이라는 말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한국인을 비하하는 용어로 사용되어 왔다. 당장이라도 큰 변화를 일으킬 것처럼 쉽게 끓었다가 금방 사그라져 언제 그랬냐는 등 잊어버리는 지극히 충동적이고 가벼운 사람들에 빗대어졌다.
물론 또 다른 정치인은 “촛불은 바람 불면 꺼진다”며 여전히 냄비 근성을 비웃기도 했다. 호된 비난은 물론이고 오히려 더욱 강한 불길을 일으키는 불씨가 됐지만 말이다.
올 한해에도 많은 소비자들을 들끓게 하는 많은 문제들이 불거졌다.
가습기 살균제에 이어 공기청정기, 에어컨에 사용된 독성물질 ‘옥틸이소티아졸론(OIT)’을 함유한 3M 항균필터, 니켈 박리 얼음 정수기, 가습기 살균제 물질인 메칠클로로이소치아졸리논(CMIT)와 메틸이소티아졸리논(MIT) 성분이 함유된 치약 등.
대기업 브랜드를 믿고 사용한 소비자들은 하나 같이 건강을 위협하는 문제들이란 사실에 아연실색했다. 심지어 뜨거운 관심 속에 출시된 최신형 휴대전화의 배터리가 폭발 위험으로 단종 결정, 대대적인 교환 및 환불 조치가 이뤄지면서 소비자들의 충격에 빠트렸다.
뜨겁게 여론이 들끓자 기업들은 빠른 대안마련에 나섰다. 눙치고 시간을 보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앞서 여러 사례를 통해 경험했기 때문이리라.
이런 변화를 이끌어 낸건 다름 아닌 소비자들이다. 자신들이 부당하게 받아야 하는 불이익에 대해 참지 않고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내왔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의 접근 방식 역시 달라졌다. 무작정 목소리를 높이거나 인정에 호소하는 형태의 과거 방식과 달리 과연 그 대안이 합리적인가, 정말 자신들이 입은 피해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가 하는 영역까지도 세밀하게 따지고 계산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접수되는 소비자 민원을 세부적으로 지켜보고 있자면 이런 변화의 흐름이 확연이 느껴진다.
개인이 대기업과 싸우는 일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지만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1년이 넘는 시간동안 대기업을 향해 지속적인 민원해결을 요구하는 끈기의 소비자들이 적지 않다.
그저 기업이나 업체의 처분(?)에 감사해하며 주는 대로 받기만 하던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라 소비자분쟁해결기준에 입각해 보상이 적당한지, 무엇이 부당하고 어떤 부분을 개선해야 하는지를 하나하나 짚고 따지는 합리적 접근 역시 많아졌다.
‘냄비 근성’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한 것처럼 ‘무조건 목소리가 큰 소비자가 대우를 받는다’는 고정관념에서도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는 걸 소비자들 스스로 인식하고 있다는 방증일 게다.
소비자들이 자신의 권익을 위해 끊임없이 합리적 목소리를 한데 모으고, 잘못되고 부당한 것을 참지 않고 들끓도록 하는 소비자들의 냄비 근성이 세상을 조금씩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 믿는다.
[소비자가만드는신문=백진주 취재부장]
저작권자 © 소비자가 만드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