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으로 여행 계획을 세웠다고 이야기하자 이미 해당 지역 여행 경험을 가진 지인들에게서 쏟아지는 조언은 한결 같았다. 소매치기를 조심해야 한다는 것.
과도한 친절을 특히 경계해야 한다는 내용 역시 공통사항이었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지갑이나 휴대전화를 잃어버리는 건 순간의 일이라고 재차 당부했다. 누구의 딸이, 누구의 친구가 스페인 여행 중 그런 사고를 당했다는 구체적 사례 역시 줄을 이었다.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이런 저런 위험과는 관계없이 무사 귀환했다. 예상보다 무더웠던 날씨와 숙소의 에어컨 온도차를 견디지 못해 걸린 가벼운 감기가 장시간 비행과 맞물려 중이염으로 발전, 여행 후 열흘이 넘도록 고생중인 건 논외로 하고...
일본, 대만, 홍콩, 필리핀, 태국, 캄보디아 등 어지간한 아시아권과 동남아 지역 여행을 하면서, 또한 지난해부터 시작된 유럽 지역 여행 계획에서 한결 같이 고민이 됐던 건 안전 문제였던 것 같다.
치안이 좋지 않다고 알려진 나라의 경우 자유여행은 엄두를 낼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패키지 여행을 선택해야 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속시원히 해결할 만한 언어 능력이 없다는 것도 한 몫 했다.
그렇다보니 이번 자유 여행을 떠나기 전 이런 저런 지인들의 조언에 힘입어 나름 꼼꼼한 여행 준비를 했다. 마침 최신형 고가의 휴대전화로 막 단말기를 변경한 터라 직접 만든 휴대폰케이스에 체인 줄을 달아 소매치기를 당하는 일은 없도록 챙기고 이동에 용이하도록 가방을 간소하게 차렸다. 휴대 가방은 줄을 짧게 해 클로스로 장착했다. 누가 봐도 ‘나는 누군지 모를 당신의 손길에 대한 충분한 준비가 됐다’는 포스가 풍겼을 게다.
이렇게 스페인이라는 나라를 향해 날을 바짝 세우고 있었던 나의 태도는 몇가지 소소한 일들을 경험하면서 달라졌다.
스페인의 남부 해안지역인 말라가(MALAGA)에선 렌트 차량을 주차할 곳을 찾기 위해 구글 내비게이션 어플에 의존해 골목골목을 누벼야 했다. 유난히 일방통행이 많다는 유럽에서 내비가 알려준 우회전을 하고보니 2차선 도로에서 역주행을 하게 된 상황이었다.
옆 차선 차량의 젊은 남성 3명 양팔을 들어 올리는 오버액션에 잘못된 상황임을 짐작했을 때 앞에서 달려오는 차들을 보고 있자니 등에 진땀이 흘렀다. 그 때 가장 앞에 선 차의 운전자가 갑자기 정차를 하더니 여유 있게 웃으며 차를 돌리라는 손짓을 보내줬다. 그 과정에서 어떤 차도 클랙슨을 울리거나 고성으로 나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라나다(GRANADA)의 좁은 골목에서 전진도 후진도 못해 발이 묶인 나에게 사이드 밀러를 접고 진행할 수 있다고 일러주며 단 한번의 클랙슨 독촉없이 짧지 않은 시간을 기다려준 스페인 중년 남성분 역시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히 고마웠다.
어떤 질문에도 영어가 아닌 스페인 말로만 시종일관 대답을 하는 통에 소통이 쉽지 않았지만 이해를 하지 못해 몇 번을 반복해 물으면 결국 종이와 펜으로 그림을 그려서라도 방법을 일러주는 사람들. 어디에서 여행을 왔는지, 음식을 맛있었는지 서투른 한글 말로 묻고는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던 식당 직원의 유쾌한 웃음.
유명한 타파스 식당(술을 시키면 안주를 무료로 준다)에서 자신의 빠에야를 한 테이블에 앉은 여행객 모두에게 한 스푼씩 같이 나눠주던 외국인 할머니, 처음엔 쭈뼛거리다 결국 상황을 즐기며 함께 사진 찍길 원했던 20대 젊은 친구들까지...
적어도 내가 열흘간 경험한 스페인은 아름다운 건축물과 한국인 입맛에 맞는 음식은 가득하지만 소매치기가 너무 많아 한시도 경계를 낮추면 안 되는 곳이 아닌, 호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느라 잠시 스치는 순간에도 ‘올라~’,‘아디오스~’라고 먼저 인사를 건네는 멋진 사람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열흘이란 일정동안 여행을 하면서 예상 밖의 뜨거운 기온과 여행에서 항상 벌어지는 일정 차질 등으로 인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나에게 스페인은 쨍하게 멋진 하늘과 좋은 사람들, 맛있는 음식을 더불어 즐길 수 있는 멋진 여행지였다.
지인들의 조언을 허투루 듣지 않고 불미스런 일을 대비해 준비를 단단히 해 둔 덕분에 누릴 수 있었던 호사였을 게다.
좋은 사람들에 대한 기억은 어떤 아름다운 풍경보다, 멋진 건축물에 대한 감동보다 또렷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다. 이제야 이런 묘미를 알게 되다니 아쉽지만 한편으로 참 다행이다.
[소비자가만드는신문=백진주 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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