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감한 외부 인재 영입에 나서며 순혈주의를 타파했고 복장 자율화 등을 통해 군대식 기업문화를 유연하고 기민하게 바꾸려고 노력했다. 정 회장 취임 후 현대차, 기아, 현대모비스의 여성 임원은 17배 늘었다.
정몽구 명예회장의 현장경영 철학을 이어받은 정 회장은 미국, 유럽, 인도, 사우디 등 글로벌 거점도 직접 챙겼다.
◆ '퍼스트 무버' 위한 전동화 전환 박차...수소·로봇 등 미래 사업 기반도 다져
정 회장은 취임 49일째인 2020년 12월 2일 그룹의 명운을 결정하게 되는 전기차 전용 플랫폼 E-GMP(Electric-Global Modular Platform)를 최초로 공개했다.
모빌리티 산업에 닥쳐올 전동화 전환에 대비해 시장의 ‘퍼스트 무버’가 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정 회장은 전동화 전환에 박차를 가했다.
정 회장은 취임사에서도“성능과 가치를 모두 갖춘 전기차로 모든 고객이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친환경 이동 수단을 구현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현대차그룹은 2021년 전기차 전용 플랫폼 E-GMP를 개발해 양산차에 적용했다. E-GMP 플랫폼을 적용한 지 4년 만인 지난 5월 판매량 100만대를 달성했다. E-GMP 플랫폼에 기반한 전기차는 현대차 아이오닉5, 아이오닉6, 아이오닉9과 기아 EV3, EV4, EV5, EV6, EV9, 제네시스 GV60 등 총 9개에 달한다.

2세대 전기차 전용 플랫폼 개발도 진행 중이다. 2세대 EV 플랫폼은 중형 SUV 차급 중심의 현행 E-GMP 대비 공용 개발이 가능한 차급 범위가 소형부터 초대형 SUV, 픽업트럭, 제네시스 브랜드 상위 차종 등을 아우르는 거의 모든 차급으로 확대된다. 현대차는 2025년부터 2030년까지 현대자동차 4종, 제네시스 5종의 승용 전기차를 2세대 전용 EV 플랫폼으로 개발할 예정이다.
전동화를 위한 대규모 투자에도 나섰다. 지난 2023년 현대차는 2030년까지 글로벌 EV 연간 판매 200만 대 달성 목표를 세우고, 이를 위해 35조8000억 원의 투자 계획을 밝혔다.
기아는 지난 4월 중장기 전략 Plan S를 통해 2030년 전동화 차량 연간 판매 233만 대를 목표로 2029년까지 42조 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미래 모빌리티 전환을 위해서는 사용자 중심 환경을 제공하는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SDV)의 차세대 인포테인먼트 시스템과 오픈형 생태계 구축을 준비 중이다.
현재 2028년 출시 예정인 아이오닉5 2세대 모델(코드명 NE2)을 첫 SDV 적용 모델로 개발 중이다.
2022년 SDV 전환을 공식화한 후 올해까지 전 차종에 OTA(무선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적용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SDV 로드맵 실행 강화를 위해 2022년 미국 스타트업 기업 포티투닷도 인수했다.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및 모빌리티 플랫폼을 개발한 업체다.
기아는 전기 PBV(목적기반차량) 사업을 2024년 1월 공식화했고 지난 6월 PV5를 선보이면서 SDV 출시를 본격화했다. 하나의 전동화 전용 플랫폼 위에 모듈형 차체를 얹어 승용, 카고, 섀시캡, 리퍼, 캠퍼 등으로 빠르게 전환 가능한 제품군을 만들어 서비스형 모빌리티로 확장한다는 전략이다.
기아는 PV5를 시작으로 2027년 PV7, 2029년 PV9의 출시 일정을 확정하고 2030년 PBV 연간 25만 대 판매 목표를 제시했다.
정 회장은 수소 분야도 미래 사업으로 점찍었다. 특히 현대차는 지난 6월 수소차 넥쏘를 7년 만에 출시했다. 넥쏘는 정의선 체제 아래 현대차가 수소 생태계의 중심에 서겠다는 의지를 반영하는 대표 모델로 평가받는다. 넥쏘는 출시 후 월 판매량이 1000대를 넘기면서 정 회장의 수소 대전환이 성과를 내는 모습이다.
다만 당장의 수소차 판매실적에 연연하지 않고 제대로 된 수소에너지 생산‧유통 체제를 갖추며 긴 호흡으로 전기차 이후 시대를 바라보고 있다.
이를 통해 2040년까지 ‘모두에게 수소 이용 가능하게’라는 목표를 세웠다. 소프트웨어와 AI를 결합한 ‘수소 에너지 + 모빌리티 이상’을 구현한다는 계획이다.

현대차그룹은 10월 내에 아틀라스를 메타플랜트 생산라인에 투입해 실증 데이터를 확보할 계획이다. 사족보행 로봇 스팟은 지난 3월 미국 조지아주에 설립된 메타플랜트(HMGMA)공장에 용접공정 외관 품질검사 용도로 배치됐다.
지난해에는 인공지능 강화 학습을 통해 실제 사람처럼 움직이는 이족보행 방식의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를 공개했다. 2021년 9월 기아 공장에서는 산업 현장 안전을 위한 로봇의 시범 운영이 시작됐다.
◆정몽구 명예회장 현장경영 계승한 정의선…순혈주의 깨고 소통 리더십으로 수평적 조직문화 구축
정몽구 명예회장이 강조했던 ‘현장 경영’은 정의선 회장 체제에서도 이어졌다. 정 회장은 글로벌 거점을 직접 챙기며 위기 대응과 미래 전략을 점검했다.
2021년 6월 미국을 찾아 자율주행 합작사 모셔널과 로봇기업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현황을 점검했고 2023년 3월에는 울산공장을 방문해 수출 현황을 살폈다. 같은 해 9월에는 미국 조지아주 HMGMA 전기차 공장 건설 현장을 찾아 진행 상황을 챙겼다.
2023년 10월에는 사우디아라비아 네옴시티 지하터널 공사현장을 방문해 현장을 점검했다. 정 회장은 "현대차그룹은 현대건설이 신용으로 만든 역사를 함께 발전시키고 책임감을 갖고 적극 지원하겠다"며 임직원을 격려했다.

지난해 4월에는 인도권역본부 신사옥을 둘러보고 현지 직원들과 해외 첫 타운홀 미팅을 진행했다. 2024년 9월에는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체코공장을 찾아 유럽 생산 거점을 점검했다.
또 한 달 뒤인 10월에는 인도법인 상장 기념식, 용인 '현대 N × 토요타 가주 레이싱 페스티벌' 참석, 광주 등을 방문했다. 당시 정 회장은 일주일동안 1만km를 이동하는 강행군을 펼쳤다. 광주에서는 KBO 한국시리즈 5차전을 관람하며 기아 타이거즈를 응원했다.
현대제철 당진 사업장도 2023년과 2024년 연속으로 방문해 직원들을 격려했다. 생산 시설을 둘러본 정 회장은 전기차 강판 개발 현황을 점검했다.

의전과 보고 중심의 관행을 줄이는 데에도 공을 들였다. 2019년 10월 서울 양재 사옥 대강당에서 '변화'를 주제로 첫 타운홀 미팅을 열어 임직원 1200여 명과 즉석 질의응답을 진행했다.
정 회장은 타운홀 미팅에서 “마주앉아 설명하는 것은 제발 하지 말아달라. 메일 보낼 때도 파워포인트 넣는 것은 안 했으면 한다. 보내는 이도 읽는 이도 힘들다. 몇 줄이라도 뜻만 전달되면 된다”며 조직문화 변화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회장 취임 후에는 복장과 근무 시간, 장소를 자율화해 과거 넥타이 부대로 불리던 조직의 분위기를 바꿨다. 여름철에는 반바지에 샌들도 허용했다. 임원 6단계, 직원 5단계에 이르던 직급도 각각 4단계, 2단계로 단순화했다. 효율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갖추겠다는 취지다. 장황한 보고서와 대면 결재를 없애고 급할 땐 모바일 메신저를 이용하는 등 보고 문화도 확 바꿨다. 군대식 상명하달 문화에서 수평적 소통 문화로 바꾸기 위한 조치들이다.
정 회장은 지난 2021년 직원들이 성과보상 체계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자 “평가 기준을 새로 마련하겠다”고 공감하며 소통했다. 2023년 신년회에는 “물이 고이면 썩는다”, “변화를 주도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며 격식을 파괴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신년회에서는 타운홀 방식으로 진행하며 직원들과 즉석 Q&A와 사진 촬영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정 회장은 현대차그룹의 순혈주의 인사를 깨고 뛰어난 인재라면 국적이나 배경을 가리지 않고 영입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난 1월 호세 무뇨스 대표는 그룹 최초의 외국인 최고경영자로 선임됐다.
지난해 말에는 글로벌 경제안보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그룹 싱크탱크 수장에 성 김 고문역을 사장으로 영입했다. 성 김 사장은 동아시아·한반도를 비롯한 국제 정세에 정통한 미국 외교 관료 출신의 최고 전문가로 불린다.
현재 현대차 사장단 9명 중 6명이 외부영입 인사다.
정 회장 체제에서 여성임원도 대폭 늘었다.
현대차는 6월 말 기준 여성 임원이 24명이다. 등기임원은 1명이고, 미등기임원은 23명이다. 2019년에는 여성 임원이 2명에 그쳤다. 기아는 2019년 여성 임원이 없었으나 현재는 7명으로 늘었다. 현대모비스도 여성 임원이 없었지만 3명이 됐다.
◆美 관세, 순환출자 지배구조, 중국시장 전략 재편 등 과제 산적
미국 25% 관세로 인한 수익성 저하, 노사 문제, 순환출자 지배구조 개선, 신흥시장 전략 재편, 현대차그룹 신사옥 추진 지연 등 앞으로 정 회장이 해결해야 할 과제도 산적해 있다.
지난 4월 3일 트럼프 행정부의 행정명령에 따라 미국으로 수입되는 자동차에 25% 관세를 부과하기 시작했고 5월부터는 자동차 부품에도 같은 세율이 적용됐다. 미국 관세 여파로 2분기에만 현대차는 8282억 원, 기아는 7860억 원의 영업이익 손실이 발생했다.
지난 7월 31일 한국과 미국이 자동차 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데 극적으로 합의했지만 관세 후속 협의를 둘러싸고 난항이 이어지면서 현재까지 25% 관세가 유지되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 경쟁사인 일본은 지난 16일부터 15% 관세율을 적용받고 있다.
현대차는 지난 9월 18일(현지시간) 뉴욕에서 열린 2025CEO 인베스터 데이에서 미국 관세 정책에 대응하기 위해 2030년까지 미국에서 판매하는 차량의 80%를 현지에서 생산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지만 단기적으로 효과를 거두기 어려운 실정이다.
노사 관계는 현대차그룹의 전통적인 리스크다. 지난해까지 현대차는 6년, 기아는 4년 무분규를 이어왔지만 올해 현대차, 현대모비스, 현대트랜시스 노조가 파업을 단행했고 생산 차질로 인한 손실만 4000억 원 이상으로 추산된다.
하도급 노동자에 관한 원청 책임을 강화하고 쟁의행위 범위를 넓히는 것을 골자로 하는 ‘노란봉투법’이 지난 8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하청 노조의 교섭 요구, 그룹 자체 노조의 역대급 임금·정년 연장 요구, 과거와 달리 복잡해진 노조 대응 환경 등에 대한 전략 수립이 필요하다.

순환출자의 지배구조 개선도 시급하다. 정 명예회장이 87세로 고령인데다 건강 이상설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현대차그룹은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현대모비스' 등 순환출자 고리가 형성돼 있다. 정 회장의 지분은 현대모비스 0.3%, 현대차 2.7%에 그친다. 정몽구 명예회장은 현대모비스 7.4%, 현대차 5.6%를 보유하고 있다.
순환출자 구조를 해소하려면 정 회장이 기아가 보유한 17.7%의 현대모비스 지분을 매입해야 한다. 지분가치는 약 4조8500억 원에 달한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2018년 순환출자 고리를 끊기 위해 현대모비스 모듈 및 AS 부품 사업부문을 인적분할해 현대글로비스에 흡수합병시키는 내용의 지배구조 개편을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글로벌 헤지펀드 엘리엇이 기업가치 훼손을 이유로 반대했고 ISS, 글래스루이스 등 주요 의결권 자문사들도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이후 현대차그룹은 지배구조 재정비와 관련해 뚜렷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글로벌 최대 시장인 중국에서의 부진도 해결해야 하는 과제다. 정 회장 취임 후 현대차와 기아는 중국 시장 판매량이 부진하다.
현대차의 지난해 판매량은 12만5000대로 2020년 44만대 대비 71.6% 감소했다. 기아는 7만8000대를 기록해 65.3% 줄었다. 현대차의 중국 시장 점유율은 2.3%에서 0.6%, 기아는 1.1%에서 0.3%로 하락했다. 현대차와 기아의 판매량과 시장 점유율이 불과 5년 만에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특히 글로벌 자동차 판매량에서 지난해 중국이 처음으로 미국을 제쳤다.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중국 시장에서 성장을 위한 전략 수립이 필수적인 상황이 됐다.
전동화 전환을 위해 배터리 기술을 내재화 하는 것도 과제다. 정 회장은 2032년까지 9조5000억 원 이상을 투자하고 전고체 배터리, LFP 배터리, 리튬 메탈 배터리 등 차세대 배터리 기술 개발과 함께 배터리 원소재 확보, 재활용 등 배터리 전 밸류체인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현대차그룹 신사옥 건설 지연도 과제다. 현대차그룹은 계열사를 통합 관리하기 위해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신사옥 건설을 계획했다. 프로젝트명은 글로벌 비즈니스 콤플렉스(GBC)다.
2014년 부지 매입 당시 높이 569m, 105층 단일 타워 조성을 구상했는데 안전성과 조망권, 비용 문제 등이 얽히면서 설계 변경이 이뤄져 현재는 54층 3개 동 규모로 축소됐다. 변경안을 지난 2월 서울시에 제출했으나 기여금 변동 등의 문제로 현재까지 진척이 없다.
제철 부문은 글로벌 탄소 규제에 대응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현대제철은 2026년부터 EU로 수출하는 철강 등 주요 산업 제품에 대해 탄소 배출량에 따라 추가 관세가 부과되는 유럽연합의 탄소국경조정제도(EU CBAM)에 대응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지난 6월 4일부터 미국이 철강과 알루미늄, 이들 원재료로 만든 파생 제품에 50% 관세를 부과하고 있어 부담이 가중되는 상황이다.
EU CBAM은 지난 2023년 10월 1일부터 2025년까지 전환기로 운영하고 2026년부터 본격 시행될 예정이다. 현재는 수입업자가 제품 생산 과정에서 발생한 탄소 배출량을 EU에 보고하는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2026년부터는 배출량에 따라 CBAM 인증서를 구매해 제출해야 한다. 현대제철은 전기로 방식 기반 전환을 추진 중이지만 상용화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소비자가만드는신문=임규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