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주에 사는 70대 김 모(여)씨는 평소보다 통신비가 많이 청구돼 통신사 고객센터에 문의 전화를 걸었다가 답답함만 더 커졌다. 김 씨를 맞이한 것은 AI 상담원. 김 씨는 음성 안내에 따라 여러 차례 메뉴를 선택했지만 원하는 상담 항목을 찾지 못했고 결국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국내 주요 기업들이 고객센터에 인공지능(AI) 상담 서비스를 속속 도입하고 있지만 정작 소비자들에게는 또 다른 '장벽'이 되고 있다.
AI 상담은 24시간 이용할 수 있고 대기 없이 빠르게 답변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그러나 배송·환불·교환·결제 오류 등 소비자마다 상황이 다른 민원에서는 문제 해결과 동떨어진 정형화된 매크로 답변을 반복하거나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엉뚱한 답을 내놓는 경우가 적지 않다.
매뉴얼에 맞춰 질문을 선택해야 하는 구조 탓에 원하는 답변에 도달하기까지 여러 항목을 클릭하거나 뒤로 돌아가기를 반복해야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긴급 대응이 필요한 상황에서도 즉각적인 처리가 어려운 경우도 많다.
AI 상담이 문제 해결 창구가 아니라 상담원을 만나기 위해 거쳐야 하는 또 하나의 관문이 되는 셈이다. 고령층, 장애인 등 디지털 취약계층 입장에서는 문제 해결은커녕 접근성 문제를 우선 고민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 AI 챗봇, 민원 내용 조금이라도 복잡하면 "이해 못해"...상담원 연결도 '산 넘어 산'
AI 챗봇이 복잡한 민원이나 긴급 상황에 대응하지 못하면서 고객센터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에어프레미아 AI 챗봇은 소비자가 자유롭게 질문을 입력해 대화를 나누는 방식이 아니라 미리 마련된 선택형 메뉴를 따라가는 구조다. 소비자가 문의 항목을 선택하면 관련 내용을 안내하지만 정해진 범위를 벗어난 구체적인 상황까지 안내되지 않는다. 원하는 답변을 찾지 못하면 다시 처음 메뉴로 돌아가 다른 항목을 선택해야 한다.

롯데택배의 AI 챗봇 '로다' 역시 질문 표현에 따라 답변이 달라진다. '택배 크기 별 요금 규정 알려주세요'라고 입력하자 '로다'는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택배 요금 규정'으로 질문을 바꿔도 답변하지 못했고 '택배 요금'이라고 간단하게 입력한 뒤에야 관련 안내가 이뤄졌다.
BMW파이낸셜 홈페이지의 AI 기반 챗봇 '조이'도 'iX3 가격'이라고 입력하자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답변을 내놨다. 'iX3 구매'라고 질문을 바꾸자 가까운 전시장에서 차량 구매 및 금융 상담을 받을 수 있다며 ARS 이용 방법과 프로모션 등을 안내했다.
SSG닷컴 AI 상담사에게 '리뷰 혜택'을 물었을 때는 질문 취지와 다른 '9월 리뷰 작성 현황'이 안내됐다. 다시 '적립금 혜택'이라고 입력하자 이번에는 "고객님의 소중한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게임사 넥슨의 던전앤파이터 챗봇에 ‘미성년자 결제 환불’을 묻자 ‘결제’와 ‘환불’ 관련 도움말과 예상 질문만 안내됐다. ‘미성년자 이용 계정 결제 환불 요청’이라고 재차 질문해도 동일한 답변이 반복됐고 미성년자 관련 안내는 제공되지 않았다.
KG모빌리티의 EV 챗봇에 전기차 수리가 가능한 서비스센터를 물었는데 돌아온 대답은 차량 모델과 가격 정보였다.
보일러 업체 대성쎌틱의 AI 챗봇 역시 “보일러가 고장났다“거나 “점검을 받고 싶다“는 아주 기본적인 문의에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답변을 내놨다.
업계 관계자는 "AI 상담 서비스가 특정 키워드를 중심으로 소비자의 질문 의도를 파악하다 보니 같은 내용이라도 표현 방식에 따라 답변이 달라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 대화도 잘 안 되는데...AI 상담원이 맞이하는 고객센터
전화 상담 자체가 없는 고객센터는 디지털 취약계층 입장에서 더 높은 장벽을 마주한 게 된다.

모빌리티 플랫폼 타다는 전화 상담센터를 운영하지 않고 앱 내 고객센터를 통해서만 문의를 받고 있다. AI 챗봇 '타다 봇'에 '차량에서 물건이 분실됐다'고 입력하자 "찾지 못했습니다. 문의를 남겨 주시면 답변 도와드리겠습니다"는 안내가 나왔다.
중고거래 플랫폼 당근마켓 역시 앱 내 AI 챗봇을 통해서만 고객 상담을 진행한다.
검색 플랫폼 '다음'은 홈페이지에 고객센터 ARS 번호를 알려주고 있으나 해당 번호로 전화하면 "더욱 빠르고 편리한 상담을 위해 카카오톡을 통한 상담을 운영하고 있다"고 안내한다. 사실상 핑퐁이다.
금융권은 상담원과 통화하려면 반드시 AI 챗봇을 거쳐야 한다.
신한은행은 보이스피싱 안내 멘트를 약 24초 들어야 하고 이후 AI 상담을 통해 문의 유형을 선택해야 상담원 연결이 가능하다. 하나은행은 상담 직원 연결 버튼이라고 안내하는 ‘0번’을 눌러도 AI 상담원 '하이'가 응대한다.
우리은행도 상담원과 통화 하려면 AI 상담사와의 대화를 거쳐야 한다. '신용 대출 신규', '전세 대출 신규' 등 문의 내용을 간단히 말한 뒤에야 상담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KB국민카드는 디지털 ARS 연결 후 상담원 연결 버튼을 클릭해도 ▲개인회원 ▲이용한도 ▲카드발급신청 ▲금융서비스 ▲아파트관리비 ▲항공예약 버튼이 다시 한번 안내된다. '개인회원'을 클릭하니 홈페이지에 안내된 대표 번호가 아닌 '1644' 번호가 따로 뜨는데 이곳으로 전화를 걸어야 일반 상담원과 연결된다.
현대카드, 우리카드, 하나카드, BC카드 역시 고객센터에 상담원 연결 항목이 없다. 음성 안내를 통해 세부 항목을 클릭해야만 상담원 연결 항목을 들을 수 있다.
SK텔레콤, KT, LG유플러스 등 통신사들도 대표 번호로 전화를 걸면 AI 상담사가 먼저 응대한다.
업계 관계자는 "대표번호 상담 과정에 AI 음성봇을 도입한 것은 상담 수요가 많은 시간대에도 고객이 보다 신속하게 필요한 업무를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취지"라고 설명했다.
이어 "간단한 조회나 안내성 업무는 음성봇을 통해 대기 없이 바로 처리할 수 있고 보다 전문적인 상담이 필요한 경우에는 상담원 연결로 이어지는 구조로 운영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 전문가들 "사람이 관여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AI 상담 체계 보완해야"
AI 챗봇으로 상담원 연결을 시도할 경우 회원가입, 이름, 연락처 등 ‘본인 인증’ 절차를 거쳐야만 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기업들은 업무 효율화를 이유로 사전 정보 입력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지만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연락처는 물론 회원가입까지 요구하고 있어 AI상담사를 이용한 마케팅 아니냐는 불만이 나올법한 장면이다.
쿠쿠의 AI 챗봇 ‘쿠비’에서 ‘상담사와 채팅’을 입력하면 이름과 휴대전화 번호, 인증번호 입력 등 본인 인증 절차를 거쳐야 상담원과 연결이 된다.
대한항공, 제주항공, 이스타항공, 에어프레미아 등 주요 항공사들도 챗봇을 통한 상담원 연결 요청 시 로그인이나 연락처 입력 등 사전 절차를 요구한다.
AI 챗봇을 통해 AS를 접수하거나 서비스 해지를 위해 최대 8단계의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도 디지털 취약계층 입장에서는 난관이다.
일례로 LG전자의 'AI 챗봇'을 통해 냉장고 AS를 접수하려면 '스스로 해결하기/출장예약 버튼 클릭'→제품 선택→증상 입력→해결 방안 제시 및 출장서비스 예약 버튼 생성→출장 예약 제품, 자주 묻는 증상 및 세부 증상 입력→이름 및 휴대폰 번호, 인증번호 입력→접수로 총 8단계를 거쳐야 한다.
전문가들은 AI가 처리하기 어려운 복잡한 민원은 사람 상담원이나 별도 상담 창구로 신속하게 연결하고 소비자가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설명하지 않도록 상담 이력을 연계하는 등의 보완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최병호 고려대 AI연구소 교수는 "AI 알고리즘의 수준은 점차 높아지고 있지만, 사용자의 질문이나 표현 방식이 사전에 충분히 학습돼 있어야 정확한 응답이 가능하다"며 "사용자가 사투리나 은어를 사용하거나 발음이 부정확한 경우 AI가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오류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기업들이 상담 효율화를 이유로 사전 정보 입력이나 인증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는 상담원 운영 비용 절감을 위해 소비자에게 불편을 전가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김시월 건국대학교 소비자학과 교수는 "아직은 AI 도입 등 디지털 전환 과도기 단계로 보인다"라며 "소비자의 연령대나 민원 유형에 따라 적절히 대응할 수 있도록 AI의 판단이 획일적이지 않게끔 체계를 정교화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영애 인천대학교 소비자학과 교수는 "소비자 입장에서는 AI를 통한 민원 제기 과정이 복잡해질 경우 오히려 또 다른 불만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AI 챗봇은 단순한 주문이나 질의응답은 가능하겠지만 복잡해지거나 판단이 필요한 경우 현재로서는 완벽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며 “일정 부분 사람이 관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공동기획 : 소비자가만드는신문·한국언론진흥재단
[소비자가만드는신문=정은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