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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탈가전의 그림자①] '빌려 쓰는 시대' 약정에 발목 잡힌 소비자들...시대 못 따라 가는 기업윤리, 보호규정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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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탈가전의 그림자①] '빌려 쓰는 시대' 약정에 발목 잡힌 소비자들...시대 못 따라 가는 기업윤리, 보호규정 어쩌나?
급성장 이면에 불완전판매‧설치오류 등 소비자 피해 속출
  • 박인철 기자 club1007@csnews.co.kr
  • 승인 2024.02.15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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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전시장의 지형도가 구매에서 렌탈로 바뀌고 있다. 구독경제라는 새로운 개념이 트렌드로 자리잡아 가면서 렌탈시장 규모는 2025년 100조 원을 넘보고 있다. 이 같은 트렌드는 소비자 입장에서는 초기 비용부담을 줄이고 지속적인 관리를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기업은 안정적인 고객기반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반면, 폭발적인 성장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후관리 문제와 고객 접점의 최일선에 서있는 방문관리 직원의 고용형태, 수수료체계 등의 구조적 한계에서 발생하는 불완전판매 등의 난제도 상존한다. 쓰면 편리하지만, 골칫거리도 잔뜩 안겨주는 '렌탈가전'의 현황과 문제점, 그리고 그 해결책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 부천에 사는 김 모(남) 씨는 가전을 구입하는 것보다 렌탈로 사용하는 것을 선호한다. 안마의자, 공기청정기, 비데 등 다양한 가전제품을 렌탈로 사용 중이다. 처음부터 목돈이 필요하지 않을뿐더러 애프터서비스(AS)도 렌탈하는 내내 무상으로 받을 수 있다. 코로나19 펜데믹 시기에는 소독 서비스까지 꼼꼼히 받았다. 김 씨는 “제품을 구입하면 무상 AS가 길어야 2년인데 계약 기간 내내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 생각해 렌탈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빌려 쓰는' 렌탈가전이 일상 생활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왔다. 목돈을 들여 값 비싼 제품을 구매하는 대신, 적은 금액을 다달이 납부하는 구독경제가 가전 분야에도 대세로 자리 잡았다. 정수기, 공기청정기, 비데 정도에 그치던 렌탈 품목이 이제는 에어컨, 매트리스, 로봇청소기, 반려동물용품 등으로 빠르게 확대되는 중이다. 

기존의 B2C용 렌탈을 넘어 △식당용 정수기 △다중이용시설용 공기살균탈취기 △식당렌탈 △AI 서비스로봇 렌탈 등 B2B 형태의 렌탈 제품도 대거 등장하면서 산업으로서의 가치가 커졌고, 대기업까지 뛰어들고 있다. 코웨이를 비롯해 정수기를 주력으로 하던 중견 기업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렌탈가전 시장에 생활가전의 절대강자인 LG전자까지 가세하면서 판을 더욱 키우는 중이다. 


KT경제경영연구소에 따르면 2006년 3조 원에 불과하던 렌탈 시장 규모는 2016년 25조 원, 2020년에는 40조 원을 넘어섰다. 2025년에는 100조 원 시장이 될 전망이다. 20년 전보다 33배 커지는 셈이다.

이는 지난해 LG전자(약 30조 원)와 삼성전자(약 26조 원) 생활가전 매출을 합친 것의 두 배에 가까운 수치다.
 


업계 '톱3'로 꼽히는 코웨이, LG전자, SK매직 등 렌탈 업체들의 성장세도 두드러진다. 이 외에 쿠쿠홈시스, 청호나이스, 교원 웰스 등이 생활가전 렌탈시장에서 경쟁하고 있다. 헬스케어가전에서는 바디프랜드, 세라젬이 업계 선두 경쟁을 펼치고 있다.

코웨이는 1998년 렌탈 사업을 처음 시작한 뒤 7년이 지난 2005년 처음 매출 1조 원을 넘어섰다. 2013년에는 2조 원, 2019년에는 3조 원을 돌파했다. 지난해는 4조 원에 육박하는 3조9665억 원을 기록했다. 1조 원에서 2조 원까지는 8년이 걸렸지만 이후로는 1조 원을 늘리는데 6년, 4년으로 시간을 단축하고 있다.
 
지난해의 경우 3분기까지 매출 2조9621억 원 가운데 91.5%에 달하는 2조5177억 원을 렌탈사업으로 벌어들였다. 2018년 81.5%로 80%대에 진입한 뒤 2022년 90.6%를 기록하는 등 매년 렌탈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렌탈 성장이 회사의 매출을 견인하는 셈이다.
 


LG전자도 렌탈사업부의 2021년 매출이 6000억 원, 2022년에는 7000억 원대를 기록했다. 지난해 연간 매출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3분기까지 6885억 원으로 연간으로는 1조 원에 근접하는 매출을 달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2016년 1131억 원으로 처음 1000억 원을 돌파한 뒤 7년 만에 10배 가까이 규모를 키웠다.
 

계정 수를 공개하고 있는 코웨이와 SK매직을 살펴보면 양사 합쳐 2016년 처음 700만 개(해외 포함)를 넘어선 뒤 2020년에는 1000만 개를 돌파했다. 이듬해 1130만 개, 2022년에도 1212만 개로 계정 수를 공개하고 있는 두 곳만 봐도 증가세가 이어지고 있다.

◆렌탈 권하는 사회?...장점 많지만 소비자 선택권 제한 지적도

렌탈 가전의 폭발적 성장은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초기 구매비용 부담을 덜 수 있다는 장점이 큰 몫을 하고 있다. 과거엔 정수기 등을 렌탈하는 비용이 현금 구매 비용에 비해 현저히 비쌌지만, 지금은 비슷하거나 오히려 렌탈이 더 싸기까지 하다. 또 AS비용, 관리비용이 모두 렌탈료에 포함돼 있어 특별히 신경쓸 것이 없다는 장점이 있다.
 
최근 시장에서 인기가 높은 얼음정수기의 경우 코웨이(얼음정수기2)는 구매가가 114만 원으로 렌탈가(월 3만1900원 3년 약정, 총 114만8400원)와 거의 차이가 없다. 심지어 쿠쿠 'ZERO 100S 끓인물 냉온정 얼음정수기'는 구매가가 275만 원인데 비해 렌탈요금은 3년 약정에 월 4만7900 원으로 총 172만4400 원에 불과하다. 렌탈요금이 구매비용보다 36% 저렴하다. 

렌탈업체 측은 약정 기간 동안 소비자들로부터 안정적인 매출을 거둘 수 있고, 고객 충성도를 높여 다음 계약에서도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는 이점이 있다. LG전자는 2021년부터 렌탈 기간이 6년 이상인 장기약정 상품을 출시하며 이 같은 장점을 극대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렌탈요금을 낮추는 대신 필터와 같은 소모품 교체를 통해 수익을 꾀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된다. 일례로 공기청정기는 제품별로 필터 권장 교체 주기가 6~16개월로 정기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구매 고객은 제조업체나 사설업체의 유상 서비스를 이용해야 한다.

현금으로 제품을 구매한 소비자가 소모성 부품을 직접  교체할 수 있는 자가관리 제품은 일부 모델에 그쳐 기업들이 구매보다 렌탈을 하도록 유도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일시불 구매 후 정기 관리를 따로 받을 수 있는 멤버십 가격은 업체에 따라 매달 1만4000원~4만3000원으로 부담이 상당하다.

기업들이 이처럼 렌탈서비스 위주의 영업을 펼침에 따라 현금 구매를 원하는 소비자들의 선택권을 제한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따른다.

이에 대해 렌탈 업체들은 “구매와 렌탈 비중이 평균적으로 3대 7 가량 되는 것은 맞지만 렌탈 비중이 오른다고 해서 매출에 특별히 영향 주는 건 아니다”라고 입모은다.

◆급성장 이면에 불완전판매 등 소비자 피해 속출...구조적 한계 드러내 

렌탈가전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는 것과 비례해 소비자들의 불만도 커지고 있다. 단기간에 외형 성장을 이뤄냈지만, 이를 뒷받침할 조직과 서비스가 이를 따라가지 못한 탓이다.

최근 이슈가 됐던 '엉덩이 티슈' 사건이 그 대표적 사례다. 지난해 11월 한 렌탈업체의 정수기 관리 담당자가 엉덩이에 문지른 물티슈로 기기를 닦는 모습이 가정용 CCTV에 포착되면서 렌탈 서비스를 이용하는 수많은 소비자들을 경악하게 만든 일이 있었다. 

렌탈 관리의 핵심은 방문서비스 직원이다. 하지만 현재 이들의 지위는 업체 정규직이 아니라 프리랜서이다 보니 관리감독이 부실할 수밖에 없다. 업체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대리점 역할을 하는 지국의 지국장 정도만 정규직이다.

이 때문에 방문관리를 제때 받지 못했다거나, 서비스가 누락됐다며 소비자들이 불만 목소리를 내고 있다. 관리 일정조차 잡기 힘들다는 불만도 많다. 방문관리 직원의 폭언 등으로 갈등 과정에서 소비자들은 2차 피해를 입는 일도 다반사다. 

이들은 기본 임금 외에 유류비, 통신비 등에 대한 지원금과 영업, 판매 실적에 따른 수수료와 계약 연장에 따른 수수료 등을 받는다. 이렇다 보니 간혹 본사와 합의되지 않은 서비스 약속 등 무리한 계약 진행으로 소비자에 피해를 끼치는 경우가 불거지곤 한다. 계약 시 현금을 지급하는 등의 행위가 대표적이다. 

용인에 사는 김 모(여)씨는 지난해 A사 정수기 설치 권유를 받고 제휴카드 발급 시 현금 20만 원을 지급한다는 담당 직원 얘기에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설치 후 약속됐던 지원금 지급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김 씨는 두 달이 지나도록 담당 직원의 연락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광주에 사는 안 모(여) 씨는 B사 방문판매원의 권유로 정수기를 한 대 더 렌탈 계약했다. 새 제품을 더 저렴하게 사용하게 해주겠다는 안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약 열흘이 지난 뒤 담당 직원은 연락두절 됐다. 더 저렴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거짓이었다. 해지를 요구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위약금 안내였다.

특히 이런 피해는 고령층에 집중되는 경우가 많다.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지난해 6월까지 4년간 접수된 60세 이상 고령층 정수기 임대 계약 관련 피해구제 신청이 195건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중 37.9%가 '계약 시 정보제공 미흡'이 원인이었다.

현장조직의 기형적 구조적로 인해서 소비자들이 피해를 입어도 본사를 통해 구제 받기는 쉽지 않다.

한 렌탈업체 관계자는 “판매원과의 구두상 약속을 믿고 피해를 입은 경우, 본사가 100% 보상을 해드릴 의무는 없다"고 말했다. 이어 "서류화가 돼있다던지 피해 증빙이 가능한 경우 원만한 합의를 하려고 노력한다”는 입장을 덧붙였다.

◆기업에 모든 것 맡긴 소비자 '약정 노예' 전락?...설치 오류와 2차 피해도 속출 

소비자가 직접 구매해서 알아서 관리하는 것과 달리, 가입기간 동안 업체가 소유권을 갖고 관리를 책임져야 하는 렌탈가전의 특성은 기존에 없던 유형의 문제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약정기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중도해지를 해야 하는 경우 발생하는 위약금 관련 불만이 쏟아진다.

위약금은 통상적으로 잔여 의무 사용 기간x정상 렌탈료x10%로 산정되는데, 렌탈가는 제품가 외에도 사후 관리, AS 등 실제로 이용하지 못한 서비스 영역도 포함돼 있기 때문에 위약금이 비싼 편이다.

연 단위의 장기계약으로 묶이는 렌탈계약은 군입대나 이민, 사망 등으로 불가피하게 서비스 이용을 중지하는 일이 발생하기 마련인데, 계정이전이나 위약금 면제 여부를 놓고 소비자와 업체가 갈등을 빚는 사례가 빈번하다.

계약자가 사망했을 때 상속자에게 위약금을 청구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대부분 렌탈회사는 계약자가 약정 기간 중 사망했을 경우 위약금 및 기기 철거비 등을 면제해주고 있지 여전히 계약자가 사망했을 때 위약금과 철거비 등을 요구 받았다는 불만글이 적지 않다.

서울시에 사는 양 모(여)씨는 정수기 렌탈 계약이 부당하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양 씨의 모친은 올해 89세로 혼자 생활이 어려워 지난해 말 요양원에 입소했다. 어머니가 혼자 사시던 집을 정리하던 양 씨는 정수기도 해지하려고 했으나 위약금이 나온다는 안내를 받았다. 어머니가 쓸 수 없다는 상황을 이야기 했으나 예외는 없다는 게 회사 방침이었다. 양 씨는 “요양원에 입소해 정수기를 쓸 사람이 없는데 사용하지도 않는 렌탈료를 내거나 그보다 많은 위약금을 내고 해지하라고 한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소비자분쟁해결기준 위면 해지 규정 
▲소비자분쟁해결기준 위면 해지 규정 
소비자 분쟁해결기준에 따르면 해외로 이주하는 경우에는 관련 자료 제출 시 위약금을 50% 감면해준다. 업체들도 이 규정을 준수하고 있지만 역시 위약금을 전액 요구받았다는 민원도 나오고 있다.

서울에 사는 조 모(여)씨는 정수기 렌털 약정 만료 2년을 남겨두고 회사에서 미국 주재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4, 5년 정도 미국에서 거주해야 해 렌털사에 해지를 요청했고 위약금이 부과됐다. 조 씨는 “부득이한 해외 전출로 인한 계약 해지인데 무조건 해지 위약금을 전액 부담해야 하는 것인가”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명의 이전 관련해서도 혼동을 빚기도 한다. 렌털사들은 모두 명의이전을 허용하고 있으나 가족 간에만 허용이 되는 업체가 있는 등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전주시에 사는 한 모(남)씨는 직장의 정수기와 비데 계약자가 본인으로 돼 있다 보니 이직하면서 명의 이전 문제로 골치를 썩고 있다. 좋지 않은 관계로 옮긴 상황이라 명의를 이전하려고 했으나 렌털사는 무조건 ‘가족 간’에만 가능하다고 선을 그었다. 전 직장에도 연락해봤으나 그의 전화를 받지 않는 상황이다. 한 씨는 “렌털료는 계속 나가는데 명의 변경도 안 된다고 하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고시한 소비자분쟁해결기준에 따르면 의무사용 기간이 1년을 넘는 경우 렌탈 계약 해지 위약금은 남은 의무사용 기간 월 임대료의 10%다. 그러나 한국소비자원 조사 결과 상당수 업체들이 위약금으로 잔여 월 임대료의 10~30%를 요구하고 있는 곳이 많았으며, 등록비·물류비 명목으로 29만~39만 원 가량을 추가로 요구하고 있는 곳도 있었다.

▲곰팡이가 핀 렌탈 정수기
▲곰팡이가 핀 렌탈 정수기

렌탈가전은 제품 특성상 전문적인 설치 작업이 필요한 경우가 많은데 이를 둘러싼 다툼도 적지 않다.

음식물처리기는 웰릭스 등 관련 기업들이 상대적으로 영세한 탓에 소비자들의 골머리를 앓게 하는 경우가 많다.

가정집 배관의 직경이나 형태를 고려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설치 가능하다고 영업해 계약을 유도하고, 추후 배관 막힘으로 인한 역류가 발생할 경우 나 몰라라 하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다. 

▲정수기 호스 설치 마감이 엉성해 누수가 발생한 모습
▲정수기 호스 설치 마감이 엉성해 누수가 발생한 모습
설치 기사나 관리 담당 직원의 실수로 작동이 안 되거나, 누수 피해 등이 발생하는 경우에도 피해보상이 원활치 않아 소비자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광주에 사는 유 모(남)씨는 지난 겨울 정수기 작동 오류로 AS를 요청했다가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 2021년 여름에 설치한 제품인데 외부에서 사용하는 제품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유 씨는 “그러면 왜 그때 설치를 해줬냐고 기사에게 따지니 별 말을 안하더라”면서 “본사에 연락한다 해놓고 여태 연락이 없이 몇 달째 돈만 빠져나가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경남 창원에 사는 김 모(남)씨는 정수기를 이전 설치하는 과정에서 업체와 갈등을 빚었다. 설치기사가 방문해선 대리석 싱크대 상판에 구멍을 뚫어야 하는데 장비가 없다며 손을 놓은 것. 요즘 신축은 대개 대리석 소재의 싱크대 상판이라 무리하게 구멍을 뚫으려다 다 깨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정수기 설치 시 전문 장비가 필요한데 회사에서 지원해주지 않아 살 수 없다는 하소연도 했다. 김 씨는 “기사가 설치 못하겠다고 손 놨고 내 입장에서도 위험부담을 안고 설치할 수 없어 해지하려 했으나 위약금을 청구하더라”며 기막혀했다.

서울에 사는 김 모(여)씨는 지난해 정수기 렌탈 사용 중 소음과 누수 등 잦은 고장으로 AS를 여러 차례 받았다. 심지어 전원을 꺼도 물이 안 멈추는 문제까지 발생했지만 교환 대신 ‘땜빵’ 수리만 반복됐다. 김 씨는 “다 처리하기 힘들어 수건으로 물기만 제거한 상황인데 위험해서 전원을 켤 수가 없다”면서 “제품에 문제가 있어 교환해 달라는 소비자 목소리를 무시해 이 사태를 야기한 본사에 피해 보상을 요구했으나 아직 회신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정수기나 음식물처리기에서 발생하는 누수 사고는 가입자는 물론, 이웃까지 '2차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은데 책임 소재를 놓고 기업과 첨예한 갈등이 빚어지기 일쑤다. 누수로 집수리비 등 추가 피해가 발생했는데 그 부분은 보상해주지 않고 제품만 책임지려는 모습을 보이는 식이다. 

서울시에서 학원을 운영하는 정 모(여)씨는 렌털 중인 정수기 누수로 아래층 요양기관 천장에 물이 떨어져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렌털업체 담당자가 방문해 정수기로 인한 누수를 확인했고 아래층 피해에 대한 배상을 약속했으나 차일피일 계속 미뤄지는 중이라고. 정 씨는 요양기관에서 보수공사를 시작해 수리 견적서를 렌털업체에 보냈으나 답이 없는 상황이다. 정 씨는 “구청 점검 전 시설을 보완해야 한다고 렌털업체에 충분히 설명했는데 아무런 진척도 없다”며 답답해했다.

인천에 사는 윤 모(여)씨는 싱크대 일체형 음식물처리기를 쓰다 이전설치를 하고 두 달 만에 배수관이 막혔다. 역류가 일어나 아랫집 천장에도 누수가 발생한 상황. 고객센터에 전화해 해지를 요청했지만 위약금과 철거비를 요구받았다고.

▲누수가 발생한 윤 씨의 집.
▲누수가 발생한 윤 씨의 집.
윤 씨는 “위약금 70만 원에 철거비를 합치면 약정기간 월 렌탈료를 합친 것보다 비싼데 이게 말이 되는 것이냐”며 답답해했다.

안마의자 렌탈 시장도 급성장하면서 신제품의 마감재가 벗겨져 있거나 내부 모터에서 화재가 발생하는 등 품질에 대한 소비자 지적이 있따르고 있다. 기기 소음, 작동 능력 미흡 등으로 소비자가 수리 및 교체를 요구해도 제품 탓이 아니라는 이유로 업체가 거절했다는 목소리가 크다.

서울에 사는 차 모(남) 씨는 2022년 6월 안마의자를 렌탈해 사용하던 중 발열 증상으로 AS를 받은 바 있다. 1년이 지난 지난해 타는 냄새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차 씨는 “AS를 받았음에도 연기가 올라올 정도로 문제 있는 제품을 또 수리 받는다고 해도 안심하고 쓸 수 있겠느냐”면서 “다른 모델 제품으로 변경을 요구했지만 그건 안된다고 하더라. 계약기간이 1년 남은 상태라 해지할 수도 없고 머리가 아프다”고 토로했다.

시장변화 못 따라가는 소비자보호 규정 문제...규정 있어도 현장에선 나 몰라라 

생활가전 제품을 둘러싼 소비자분쟁이 발생할 경우 국내 기업들은 대체로 소비자분쟁해결기준에 따라 보상을 진행한다.

하지만 소비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물품대여사업 관련 규정은 시장 성장 속도에 비해 한참 뒤쳐져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규정이 갖춰져 있지만 현장에선 이를 무시한 채 자체 약관과 규정을 앞세워 소비자에 위약금 타령을 하는 사례가 빈번하다.

2023년 11월 한국소비자원이 가정용 안마기기·의료기기 렌탈서비스를 제공하는 10개 사의 약관과 표시사항 등을 조사해 발표한 결과, 약관 내에 소비자에게 불리한 내용이 다수 포함된 것으로 나타났다.

소비자가 월 렌탈료 납부 지연 시 법정이율(연 5~6%)과 비교해 과도한 지연손해금(연 12~24%)을 요구하거나, 설치비·철거비, 청약철회 시 반환 비용 등 사업자가 부담해야 하는 비용을 소비자에게 전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렌탈서비스업의 경우 소유권 이전조건 등 총 5개 항목을 중요정보 항목으로 지정하고, 사업자 홈페이지, 제품 라벨, 설명서 등에 중요정보를 표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렌탈 총비용 관련 표시사항, 소비자 판매가격 관련, 상품의 고장·훼손 분실 시 책임 범위, 소유권 이전 조건 관련 등을 정확히 명시하지 않은 곳도 있다. 대형사들은 대체로 규정을 명시하고 있지만 중소형사나 온라인에서 여러 브랜드 렌탈 계약을 중개하는 플랫폼의 경우 누락된 경우가 많다.

소비자분쟁해결기준 물품대여서비스업에 따르면 사업자가 서비스를 지연할 경우 지연한 만큼 렌탈서비스 요금을 감액해야 하며 재발하는 경우 위약금 없이 계약을 해지해야 한다. 그러나 현장에선 앞서 언급한 몇 달 동안 관리 서비스를 해주지 않고도 소비자가 해지를 요청하면 업체 측이 위약금을 요구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소비자분쟁해결기준 자체가 권고사항이어서 이를 강제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기준을 준수한다는 공식적인 입장을 내고 있음에도 현장에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렌탈 중 ▲정기 관리가 안 되는 지역으로 이사하는 경우 ▲제품 본래의 기능 상실이 우려되는 지역으로 이사하는 경우 위약금 없이 계약 해지가 가능하다고 명시돼있지만 위약금을 안내 받았다는 소비자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또 음식물처리기처럼 새롭게 뜨고 있는 제품은 소비자분쟁해결기준에 아예 관련 규정이 마련되지 않아 업체 측에 책임을 추궁할 근거조차 없는 상황이다. 

소비자문제 전문가들은 기업들이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줄 것을 촉구하는 한편, 관련 규정의 정비가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정수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사무총장은 “렌탈 시장이 커지고 있지만 그만큼 렌탈료, 제품비용도 오르고 있다. 소비자는 담당자가 정규직인지 아닌지를 보고 제품을 구매하는 게 아닌 만큼 본사에서도 양자 간에 문제가 생길 시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또 철저한 교육으로 피해를 예방하려는 모습을 보여야할 것”이라 말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소비분쟁해결기준이 렌탈 시장 확대와 변화에 맞춰 보완되어야 하는데 이런 부분이 다소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김종진 일하는시민연구소 소장은 “정부와 노사협약, 표준적 수수료 체계를 모색하는 자리를 형성하는 것이 우선 과제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소비자가만드는신문=박인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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